매월당 김시습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질이 총명하여 3세때 시에 능숙하고 5세에 대학을 통달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13세 사서삼경과 경학에 전통하였으며, 명성이 높은 윤상 선생에게 제자백가를 배웠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3일이나 통곡 비정한 정치를 비관 책을 모두 불사르고 중이 되어 양주, 수락산을 비롯하여 설악, 금오산 등지로 두루 방랑 세상이 허무함을 노래 부르며 세조를 호통하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안장하였다는 용감한 걸출한 학자이다.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용한 사상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세조가 즉위한 후 재능을 아끼어 여러 가지 벼슬로 관직에 돌아오게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는 이율곡을 시켜 전기를 쓰도록 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해동(海東)의 백이(伯夷)로 칭하였으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1782년(정조 6)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효온과 더불어 영월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금오신화 金鰲新話》 《매월당집 梅月堂集》 《십현담요해 十玄談要解》가 있다. 율곡 이이는 김시습전에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요동하는 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