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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이야기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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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파주문화원 2023-04-08 125
매죽헌 성삼문 묵개울 이야기

 

성삼문(成三問) 선생은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파평산 남맥 관모봉 하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할아버지 성달생(成達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계묵(溪墨) 산골짜기 현 불당제 터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글씨를 얼마나 썼던지 이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흘러 검은 물이 내려와 묵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선생의 할아버지 성달생(成達生)이 세종 26(1444) 세상을 뜨시니 금곡리에 묘소를 쓴 후 아버지 승()이 세종 22(1440) 경상병마 절도사를 있을 때 파주에서 홍주(洪州)로 이주하게 되었다.

선생은 세종 20(1438) 식년문과 생원시에 하위지와 함께 장원급제 하였으며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학사 수찬을 거쳤으나 신숙주와 예기대언독(禮記大諺讀)을 편찬,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항상 세종대왕을 가까이 모셔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정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위해 당시 선생은 요동(療東)에 유배되어 있는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 질의와 수십차례 명나라를 오고 가면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한 끝에 세종 28(1446) 9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하는데 크게 기여한 문장가이며 대학자이시다.

 단종 3(1455) 예방승지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을 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로 있을 때 아버지 승(), 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 복위를 모의, 4월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 한명회, 권남, 정인지 등 일파를 없애기로 협의를 했으나 당일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하였던 김질이 성사가 안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밀고를 하여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으며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한 후 선생과 그의 가족 10여명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선생의 넋을 추모하는 홍주의 노은동에 록운서원, 육신묘, 영월에 창절서원, 의성의 학산충열사, 창영의 물계세덕사, 연산의 충곡서원, 동학사 등에 봉안되었으며 영조 34(1758)에 이조판사로 증직 충문(忠文)으로 시호를 받았다.

선생이 억울하게 사라지니 후손이 절손되어 법원읍 금곡리 뒤산 관모봉(冠帽峯) 아래에 초라한 조부모 산소와 숙부, 종제의 설단(設壇) 그리고 살던 집터(성부터) 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 6. 성삼문과 묵개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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