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북한 지역인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구 장단군 귀산현) 향정리 정자동 (金川郡 兎山面(舊長湍郡鬼山縣)香亭里 亭子洞) 북쪽 구연천변(九淵川邊)에 우뚝 서있는 약 40자 높이의 용바위는 그림에서 보는 용의 모습과 흡사하다. 고서(古書)에는 용암(龍岩)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주민들은 우리말로 용바위라고 일컬어오고 있다. 이 용바위에서 남쪽으로 300m가량 가면 개자리(방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황희정승이 태어날 적에 구연폭포가 일시 말랐다가 흘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분이 성장하여 호(號)를 방촌(厖村)이라 했음은 자신이 태어난 동리이름을 아호(雅號)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이 개자리마을에는 지금으로부터 600 여 년 전 황씨(黃氏)가 살고 있었는데, 혈육이 없어 부인이 자식하나 점지해 달라고 용바위 밑에서 석달 열흘 백일정성을 드렸더니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홉 달 만에 남자아기를 출산하니, 용바위에서 백마우는 소리가 세 번 크게 울렸다 한다. 어머니는 아기가 자라서 크게 될 것을 알고 고이고이 길러 글공부를 시키니 두뇌 명석하여 글공부는 물론 의견도 출중했다. 이 아기는 예상했던 대로 큰 인물이 되어 조선 창세에 모든 정사를 새롭게 한 명정승으로 호는 방촌(尨村)이며 이름은 희(喜)라. 이분은, 고려조에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開創)한 후에 조정에 나와 국초(國初)에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크게 성공시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성계는 나라를 세웠으나 인재가 없어 국정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고려왕조의 충신들은 두 군왕(君王)을 섬길 수 없다하여 역사에 기록된바와 같이 72人의 전직 고위관리(高位官吏)가 두문동에 은거생활을 계속하고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성계는 할 수 없이 두문동에 찾아가 협조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전원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72人은 이성계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71人이 의논하여 黃정승만을 內洞으로 나가 이성계를 도울 것을 결의하여 黃정승만이 조선조 창건에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황정승은 태조로부터 4대 임금 세종에 이르기까지 장장 60여년간 조정의 모든 요직을 거치는 동안 24년간 재상의 권좌에서 덕행과 선정으로 일관 이조 창건의 국기를 다지고 기강을 세우는데 온갖 힘을 다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