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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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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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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산리(檢山里)와 조음발동(助音伯)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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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를 역임하고 누대 고령에서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高靈)으로 하였다. 칠세손(七世孫)인 엄헌공 신장(嚴軒公申檣)은 1382년(우왕 8)에 탄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능숙하여 1394년(태조 3) 부시에 장원, 1402년(태종 2)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左郞)에 있다가 퇴임 후 전라도 나주로 낙향하여 서당에서 유생들을 지도하던중 1402년(세종 2) 직제학에 제수되자 처와 오형제(孟舟, 仲舟, 叔舟, 松舟, 末舟)를 두고 한양으로 상경 이어 공조참판으로 승진 남산지곡(南山之曲)을 짓는 등 유학에 조예가 깊어 글씨도 잘 써서 대제학에 발탁되어 오래 머물렀으나 1433년(세종 15) 52세로 세상을 떴다. 나주에서 1,000리 길이라 처와 아들 맹주(21세), 중주(18세)만이 상경 장례를 치루고 이 곳(현 검산리 조음발이)에 모시게 되어 시묘를 마치고 난 얼마후 신숙주(申叔舟) 모친(신장부인)마저 돌아가니 역시 맹주와 중주 형제가 올라와 쌍분으로 장례를 모시게 되었다. 시묘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궁중이 어수선한 때이라 묘비를 파묻고 분묘와 묘역을 파헤쳐 흔적을 숨기고 암표만을 남기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맹주와 중주가 조사(早死)하므로 묘소를 찾을 길이 없어 실종되어 오던 중 신숙주가 1439년(세종 21) 등과에 올라 단종 당시 도승지를 역임하다 세조가 등극하자 이를 쫓아 병조판서에 오르고 1457년(세조 3) 좌찬성에 있으면서 단종과 금성대군을 처형할 것을 모의하던 한명회와 권람이 강력히 주장, 금성대군은 사사하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어 자진(自盡)케 하였으며 1458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어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元相)이 되어 남이장군을 숙청하고 1471년(성종 2)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그후 동생인 송주, 말주를 시켜 말만 들었던 지역과 선친 묘소를 대강 일러주면서 기필코 찾도록 하니 즉시 활을 메고 두 형제는 월롱산을 두루 이잡듯이 찾다가 어느 날 이곳(현 조음발이) 골짜기를 들어갈때 중이 집집마다 괭매기(중 시주 밥그릇)를 치며 시주를 받는 것을 보고 옳지 이 도승에게 물어 보리라 하고 달려가서 혹시 신장묘소를 아느냐고 물으니 괭매기를 두드리고 합장하며 말하기를 이 산 윗 골짜기에 모시었다는 말만 들었다 하며 사라졌다. 이에 허둥지둥 올라가다 마침 꿩 한 마리가 날아가서 활을 당겨 쏘니 묘소 있는 곳에 떨어지는지라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 근방의 산혈맥을 살펴보니 묘소가 있을 법하여 여기저기 흙을 파는 도중 큰 돌이 나와 헤치니 비석이라 이를 씻어 자세히 본즉 신장 선친의 묘비가 틀림없었다. 수십일 동안 고생 끝에 찾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상경하여 형인 숙주 영상에게 사연을 고한 후 즉시 분묘를 하고 비석을 세워 시향을 받들게 되었다 한다. 그후 신장묘를 찾기위해 이산 전체를 검색하였다 하여 검산(檢山)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도승의 괭매기 소리의 도움을 받았다하여 조음발이(助音鉢)라 호칭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 후 엄헌신장(嚴軒申檣)선생이 훈학하던 나주에 서당을 지었는데 설제서원(雪齊書院)으로 사액되어 후학들이 매년 배향을 지내고 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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