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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문화원은 우리 고장의

  • 전통문화 보존계승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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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우리 고장 파주의
지명유래를 소개합니다.

17 관리자 2022-12-20 40
임진강변 내소정 팔경시(來蘇亭 八景詩)의 유래
 이 시는 내소정(제창군과 신승선 건립)에서 호곡 남용익 (숙종대왕때 명시인) 이 작시한 것으로 남용일은 대제학을 겸한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인형왕후 폐출당시 이를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헌공이다. (1)화석정춘(花石亭春)  화석정전화사신(花石亭前 花事新) 화석정 앞뜰에는 꽃이피어 새로운데  독래음상유한인(獨來吟賞 有閒人) 쓸쓸한 나그네 홀로와서 시를 읊으니  유방거세무상식(幽芳擧世 無相識) 온 세상 그윽한 높은향기 서로 알지 못했으며  가석선생거후춘(可惜先生 去後春) 애석하다 선생님 가신뒤에 새로 알았네. (2)장암수균(場岩垂鈞)  수균춘만백척대(垂鈞春灣 百尺臺) 봄날 강어귀 높은데에 낚시줄을 드려놓고  득어장욕고심배(得魚將慾 沽深盃) 고기를 잡으면 이에 큰술잔 사려고 하였는데  방인불해오심사(傍人不解 吾心事) 옆에있는 사람 나의 심사 알지도 못하고  만도동강물색래(漫道桐江 物色來) 거짓말로 동강에서 색다른 물건이 온다하네 (3)송암청운(松巖淸雲)  하처염운점점부(何處炎雲 點點浮) 여기저기 뭉게구름 점점이 떠있는 데  원산여하흡영두(遠山如畵 恰盈頭) 먼산은 그림같이 아름답게 솟구쳐있네  횡차망안지다의(橫遮望眼 知多意) 곁눈으로 바라보니 사연도 많이 있은 것 같은데  원야소인조고수(怨惹騷人 弔古愁) 근심많은 사람 옛수심지어 죽지 않을까 의심나네 (4)장포세우(長浦細雨)  장포세우청비비(長浦細雨 晴 비비 ) 장포뜰에 가랑비 개었다가 눈이 펄펄 날리고  백로횡분초색비(白露橫分 草色飛) 백로들은 가로질러 벌판위로 날아가네  어자불수풍랑기(漁子不愁 風浪起) 어부는 풍랑이 일어나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익선요환록사의(依船遙 喚 綠사 衣) 뱃전에서 우장옷을 내오라고 소리를 치네 (5)동파고역 월당루(東坡古驛 月當樓)  동파고역월당루(東坡古驛 月當樓) 동파옛역 마루에 달이 비쳐 명랑한데  처처인가간상구(處處人家 看上鉤) 이곳 저곳 인가에는 발을 걷어 올리누나  일점규성간불원(一點圭星 看不遠) 하나의 큰별만이 멀지않게 보이는데  영소응인광한유(令宵應人 廣漢遊) 오늘밤 맞이하여 광한(광한루)놀이 하여보세 (6)적벽선유(赤壁船遊)  적벽기두경부주(赤壁磯頭 更浮舟) 적벽이 둘러쌓인 강에 다시 배를 띄우니  소산거후상풍유(蘇山去後 尙風遊) 소동파가 간 뒤에도 풍류는 여전하네  파잔월백개양야(波殘月白 皆良夜) 파도는 잔잔하고 명랑한 달밤 모두 좋으니  불필황강임술추(不必黃岡 壬戌秋) 황강땅 임술지추만은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7)동원설(桐園雪)  동원모설백애애(桐園暮雪 애애) 동원에 날이 저물어 흰눈은 환히 비치는데  망이평파제색개(望裏平坡 齊色開) 편편한 언덕위를 바라보니 구름없이 개었구나  입야강비종불엄(入夜江扉 終不掩) 밤이되도 강가에 있는 집 싸리문이 열렸으니  섬계의유자유래(剡溪疑有 子猶來) 아마도 섬계땅의 왕자(子猶)오기를 바람이니라 (8)진사효종(津寺曉鍾)  진두사격백설층(津頭寺隔百雪層) 나루 위에 높은절은 백운의 층계로서 가렸으며  반야도종유노증(半夜嶋鍾有老增) 한밤중에 종이 울리니 노승이 있는것이리라  불시고소성외박(不是姑蘇城外泊) 이 고소성 밖에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련만  한천낙천우어등(寒天落天又漁燈) 찬하늘에서 달이지니 또한 어등이 비치누나  ※ 이 시는 당나라의 장계(張繼)의 풍고야박시(楓稿夜泊詩)를 비유한 것임 신승선(愼承善) 1436(세종 18)~1502(연산군 8) 〈조선〉문신. 자는 자계(子繼)·원지(元之), 호는 사지당(仕止堂), 본간은 거창(居昌), 관찰사 전(詮)의 아들, 임영대군(臨瀛大軍:世宗 3男) 의 딸과 결혼, 1454년(단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돈령부승(敦寧府丞)이 되고, 1456년(세조 2) 한성부 우윤(漢城俯右尹)을 거쳐 병조참지(兵曺參知)로 문과중시 (文科重試)에 장원, 이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했다. 이듬해 이조와 공조의 참판(參判), 1468년(예종즉위) 다시 병조 참판이 되어 익대공신(翼戴功臣) 3등이 되고,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진후 다음해 병조 참판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3등이 되었으며 1476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9년 평양 선위사(宣慰使)를 거쳐 1481년 행동지돈령부사(行同知敦寧府事)·공조 판서를 역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1484년 빈객(賓客)을 겸직, 2년후 병조판서로 특진관(特進官)을 겸하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에 책봉 되면서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이어 행(行)예조 판서· 사소대장(四所大將)·이조판서, 1494년 우의정에 올랐다. 1495년(연산군 1) 산릉간심사 (山陵看審使)를 겸직,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을 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고, 1497년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시호는 장성(章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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