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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문화원은 우리 고장의

  • 전통문화 보존계승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명유래

우리 고장 파주의
지명유래를 소개합니다.

15 관리자 2022-12-20 91
우계(牛溪) 선생의 유적 유래
우계(牛溪)선생은 중종 30년(1535) 6월 25일 한성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중종 39년 (1544) 9월 9세 때에 아버지 청송(成寸琛)선생이 파주 우계로 이주하게 되어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스스로 자습하여 경서와 문사에 뛰어났다. 17세 때 순천군수 신여람(申汝襤) 의 딸 고령신시와 결혼하였으며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급제하였는데 그 당시 시장(時場) 울타리에 구멍을 뚫어 드나드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기며 과거를 포기하기로 결심 휴암(白仁傑)선생에게 상서(尙書)을 배우면서 학문에 전념 율곡(栗谷) 선생과 교유를 맺었다. 27세때 모상(母喪)을 입었으며 30세때 아버지 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시묘를 살고 선조 1년(1568) 2월 34세에 이르러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선서참봉으로 등용 목청전 참봉으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 원서, 장영, 적성현감 등으로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은하였으며 37세때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조헌(趙憲)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도들이 모여들어 서실의(書室儀) 22조문을 벽에 걸고 제자를 지도하였다. 선조 5년(1572) 율곡 선생과 9차례나 서신 왕복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선조 6년(1573)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어 장영, 지평을 역임하였다가 사임한 후 선조 7년 공조정장, 통예원 인의(引義)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서를 올렸으며 선조 8년 7월 공조정랑에 소명되어 부득이 역임하다 9월에 사임 파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주부, 장영, 첨정등에 계속 불렀으나 사은하고 47세때 종묘령으로 상경하여 폐임 선조 15년(1582) 집의, 사정 병조참의 이조참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득이 잠시 머무르다가 사임 파산으로 돌아왔고 11월에 이조참판으로 특배되었고 12월에 사은하였지만 선조 17년(1584) 정월에 율곡이 사망하여 2월 사귀(辭歸)를 청산하고저 하였으나 불허되어 동지중추부사를 역임 귀향할 것을 청하여 왕의 윤허를 얻어 귀향하였으나 왕이 다시 상경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사직서를 올린 후 계속하여 경기감사 이조참판 첨지중추부사로 배수되었으나 모두 사은하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의 아들 문준(文濬)을 불러 “내가 국난을 당하여 궐하(闕下)에 자진하지 못하니 군신의 분기를 회복할 곳이 없다. 그러니 대가(大駕)가 만약 서쪽으로 향해 이곳을 지나면 나는 당연히 길가운데서 곡 하다가 대가를 따라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죄척지신(罪斥之臣)이 또한 감히 스스로 방면할 길이 없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5월 20일 선조대왕께서 서울을 떠나 날이 저물어서 파주를 지나 임진강을 건너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 뒤 4월 29일에야 대가가 지나갔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안협, 이천, 연천, 삭영 등지를 전전긍긍 폐난하였다. 그러던중 7월에 세자가 이천에서 체류하면서 선생을 불렀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고 답자만을 올리니 세자 명령으로 개성 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 세자 부름에 10월 선천에 도달하여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를 따라 갈 것을 청하였다. 대조에서는 우계가 선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우참찬에 특배하였으나 11월에 순천에 도착 후사를 부탁하고 의주로 행조 한 후 우참찬의 직을 사은한 뒤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대가가 정주로 돌아갈 때 병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영유로 와서 대죄하였다. 5월에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거쳐 선능과 정능을 봉심하고 돌아올 때 재령에서 병으로 머무르다가 9월 해주 행조에서 복명하였다. 대가가 환도할 때 석담정사(石潭精舍)에 우거(寓居)하 니 율곡 문인과 제생들이 특강을 청하여 교수하였다. 환도후 좌참찬으로 임명 비국당상 (備局堂上)을 겸하였다가 사직을 청하니 윤허되지 않아 우참찬으로 전직되어 사직서를 올렸으나 불허되어 용산으로 나와 결해소(乞骸疏)를 올리고 병으로 서강을 출발하여 연안각지에 우거하였다가 파산으로 돌아온 후 선조 31년(1598) 6월 6일 파산서당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주읍 향양리에 안장되었으며 인조 6년(1628) 파산서원에 배향되고 인조 11년(1633) 좌의정에 증직 문강으로 시호가 내려진 후 숙종 8년(1682) 율곡 선생과 함께 문묘에 승무되었다. 선생은 평생을 유가정신으로 수기의 실천 철학과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기본 바탕을 확립 성리학과 경제사상을 불어넣어 충의의 선비로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위대한 유학자 대가이시다. 선생의 사당이 있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된 이후 사숙공파(成世純)종회가 중심이 되어 복원계획을 세웠으며 다행이 1978년 7월 16일 우계 선생 묘역이 경기도 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됨에 따라 우계 사우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 정부 보조금 2,500만원과 성금 2,500만원으로 1987년 6월 11일 파주읍 향양리 묘하에 사우가 준공되어 숙원사업이 완수 정화되었으며 이날 경기도 관계관과 파주시장 각기관 사회단체장 본손을 비롯하여 유림 수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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