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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문화원은 우리 고장의

  • 전통문화 보존계승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명유래

우리 고장 파주의
지명유래를 소개합니다.

14 관리자 2022-12-20 110
독립투사 박찬익(朴贊翊)의 유래
박찬익(朴贊翊)선생은 서기 1884년에 파주읍 파주리 마산동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시다가 1904년 서울 관립상공학교에 재학중 항일사상이 투철한 선생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모의하다 퇴학을 당하였다. 1906년 안창호, 이시영, 이회영, 이동영, 신채호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한 후 다시 배움을 결심 1908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후 동년 8월 29일 국치의 한일합방이 조인되니 선생은 만주 용정으로 망명 북간도에서 혁명 선배 이상설, 배순 등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라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大宗敎)에 입교하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 선양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중국 관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으로 화용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인학교를 설립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어 성장(省長)과의 담판으로 대종교 탄압이 융화되니 일경의 주목이 날로 심하여 북간도를 떠나 길림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상해에서 신규식과 제휴하여 양국에 뜻 있는 청년들을 규합 동제사(同濟社)를 창립 복업정일(復業精一)이란 중국명칭을 가지고 행세하였다. 1918년 신규식과 함께 손문의 북벌에 참여 신해혁명이 성공되어 동맹회 지도급 인사들과 가깝게 되어 중국의 여러 무관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켜 독립군 간부 양성에 기하였다. 신규식의 비밀지령(파리평화회의 사절파견, 3·1운동 등)을 받아 가지고 서북간도 및 노령(露領)등지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국내의 3·1독립선언과 동경 유학생들의 조선독립 청년단 명의 2·8선언에 앞서 길림에서 서일, 여준,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황상규, 유동설 등 39인의 명의로 한국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국내 및 미주, 로영 등지로 우송하고 또 대한 독립의 군무를 조직하여 파리회의에 전문을 보내어 한국독립을 청원하였다. 다음해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동월 하순 선생은 이동영, 이시영, 조성환, 조소앙, 김동삼, 조완구 등 30여명의 동지들과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의정원으로 피선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육성에 노력하였다. 동년 4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을때 선생은 박은식, 신채호, 송정도, 조성환 등과 같이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단 단장 서일은 1919년 8월 7일 왕청련에서 현쳔목, 김좌진 등과 대한 군정서를 조직하여 만주에서 임시정부로 교민 자치와 무장활동을 전개하자 총재 서일과 총사령 김좌진과 교의가 깊은선생은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면서 군정서 외교처장의 중임을 맡아 임정과 군정서 사이의 외교를 전개하여 동년 12월에 대한군정서가 임정 산하로 들게 되어 북노군정서로 개편 독립운동 노선체제를 갖추었다. 1921년 7월 7일 임시정부 외무부의 사무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무총장 신규식은 국무 총리를 겸직)외교 임무를 전담하여 주로 대중외교에 치중하였다. 동년 8월 임시정부의 재정이 궁색하게 되자 선생은 안창호와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상해 및 대만교포들에게 군자금을 의연하도록 권하는 한편 조소앙과 중국 국민정부 요인들에게 우리 독립당의 주의강령을 설명하고 원조를 청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동월 13일 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태평양회의 만국교육대회, 세계신문대표자회의에 출석하여 한국독립을 선전 활약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동년 중국 국민당 손문이 광동에 중국호법 정부를 수립하자 동년 11월 18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겸 외교총장직에 있는 신규식이 임정에 특파 전사로서 호법정부를 예방할 때 선생은 부사의 자격으로 광동에 가서 임정에서 호법정부를 정식승인함과 동시 호법정부로부터 임정을 정식 승인 받은 외교활동을 보좌함에 성공하자 선생은 대표에 임명되고 1922년 2월 7일 특파 교섭원에 임명 대중외교를 전담하여 활약하다가 동년 9월 신규식이 서거하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부터 복순(僕純)이라 이름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로 일헌병에 체포선풍이 일자 김구선생과 임정 요인들을 피신시키는데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협조와 편의를 얻었으며 우리 독립운동의 실적을 중국 정부에 크게 선전하여 또한 큰 효과를 얻었는데 김구선생도 후일의 술회(百凡逸志)에서 말하고 있다. 1932년 11월 선생이 오문(澳門)에 피신하여 있을 때 상해 동북의용군 후원회장 왕보진이 고아동으로 가던 도중 옥문에 들린 기회에 김구, 안중근과 같이 한중협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를 중한연합동화의용군대회라 고쳐 한중합작의 항일전을 펼것을 정하여 본거지를 광동에 두고 김구, 왕보진, 황명당을 위원으로 하여 동북 의용군의 후원기금을 모집하는데 노력하였다. 또 광동에 있는 한국국민당 전위총무를 한국 독립당 광동지부라 개칭하고 양명진, 이식부를 상무위원으로 하고 중국 국민당의 보조를 받아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 배일원중공작에 활약을 하였다. 윤의사 의거로 중국 조야에 우리 임정에 대한 신망이 높아져 장개석 주석의 명을 받은 중국 국민당의 조직부장, 진과부의 연락으로 선생은 1932년 5월 김구선생을 모시고 장개석을 남경중앙 군관학교 구내에서 면회케하여 한중양거두의 역사적 회견에서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확약 받았다. 1.한국 독립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도와줄 것. 2.중국교육기관에서 한국청년의 교육을 해줄 것. 3.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가의 지원과 교포의 보호 이 한중혁명의 영수회담이야 말로 한중합작 항일전의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협정은 8·15광복까지 굳게 지켜졌다. 1938년 중일전쟁시의 기강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고 1940년 9월에 임정 이중경으로 옮겨져 10월에 국무위원에 피임되고 학무, 법무, 선전, 생계의 4부가 증설되자 선생은 법무부장으로 피임되어 법 재정리에 진력하였다. 1944년 2월 신헌법에 의하여 국무위원을 개선할 때 또 다시 당선되어 임시정부의 고문까지 겸하며 광복까지 다난하였던 전시 내각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후 선생은 김구선생의 남북협상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세로 인하여 수도육군 병원에 입원 가료중 1949년 3월 9일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향년 66세로 서거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퉁령, 김구, 조완구 등 옛 동지가 모인 가운데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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