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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문화원은 우리 고장의

  • 전통문화 보존계승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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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옛 이야기

우리 고장 파주의
옛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6 관리자 2022-12-20 202
시인 고죽 최경창선생에 얽힌 전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은 서기 1539년 9월(중종34) 월롱면 영태리 에서 출생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 (朴淳)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 峰 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白光勳), 이 달(李達)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다. 서기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 장원 급제하고 대동도찰방(大同都察訪)을 거쳐 1575년 정 언(正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지냈으며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도중에 죽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피리를 잘 불어 영암 해변에 살 때 왜구를 만났으 나 퉁수를 구슬피 불자 왜놈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감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숙종 때 청백리에 록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경도 북평사에 있을 때 사귄 홍낭(洪娘)은 관북인(關北人)으로 홍 원(洪原)의 명기로 이름이 났고 출상한 재화로서 그의 절창인 시조일수가 오직 청 아와 정숙을 담아 주옥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최경창이 북평사 퇴임할 때 낭(娘)이 석별하여 바친 글월로 한역번방곡(漢譯飜方曲)을 지어 읊으시니 격조 높은 쌍벽 으로 세전되어 홍낭의 문명시사에 빛나고 있다. 또한 고죽선생 풍류반려(風流伴 侶)에 기록되었으며 낭(娘)은 고죽선생이 관북(關北)에 있을 때 막하에서 조석으 로 모시었고 환경(還京) 3년 후 요한 하신다는 전언을 듣고 불원천리 칠일만에 상 경 시양을 하였다 하며 경성 객사에서 1583년(선조16)에 돌아가시자 영구따라 공 근 시묘하니 지순고절(至純高節) 당세에 빛냈으며 낭이 죽자 문중합의로 고죽선 생 묘전에 후장하였으니 낭이 인창을 가히 알지니라. 당초에는 파주시 월롱면 영 태리에 있는 누대 선영하에 모시었으나 정부시책상 증발되어 후손들의 주선으로 교하면 다율리로 고죽선생과 함께 1969년 6월 12일 천장되어 심산의 한떨기 유향이 고죽선생의 유덕을 문중사화로만 그치니하고 새로 비명하여 홍낭 시인도 함께 영세를 기하는 동시 숭문상덕(崇文尙德)의 조훈에 보답하기 위하여 문명을 다시 현창하였다. 유서는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으니 고죽선생을 사모 하여 보낸 홍낭의 애절한 연시(戀詩)를 받고 이를 한역(漢譯)하여 사랑의 편지와 함께 보냈던 친필을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1981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소재) ◇홍낭 연시와 고죽선생 번방곡비문◇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남의 손대자시 난창밧긔 섬거다 보고쇼서 밤비예 새님곳 나거단 나전가도 너기쇼셔 (홍낭) 절양류기여천리 인위아시향정전(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 수지일야신생엽 추췌수 미시강신(須知一夜新生葉 椎悴愁 眉是姜身) (고죽) 이 비는 고죽선생의 전적에 의하여 서기 1981년 11월 전국 국어, 국문학, 시가비 건립 동호회(同好會) 김동욱(金東旭)외 56명과 문중협의로 시비를 1969년 6월 건 립한 것임.(국문학 전사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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